다산 정약용 천주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계속해 하지만 그 전에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천주교”또한 언급, 정약용, 이승훈의 “배교죄송합니다”에서는 자신의 배교를 더 면밀히 조사했지만 배교의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였지만 그의 적극적인 배교로 많은 초기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지금까지 ‘남양주 겨울기행 – 여우당과 수종사&다산 정약용’다산이 천주교를 처음 접한 것은 마재에서 열린 맏형(큰형의 아내 정약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두미협(지금의 남양주 팔당 부근)에서 돌아오는 배에서였다. 고향 남양주. 이때 처남 정약전과 함께 시댁 이벽(형의 여동생)에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그 후 이 두 사람(정약전,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
※ 이벽(1754-1785)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병지호란 이후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조부 이경상에게서 천주교에 대해 배웠고, 이후 정약용의 처남인 이승훈보다 먼저 개회식에서 설교했다. 한국 천주교의 법사. (☞ 순례길에 선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정약용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1983년 소고사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대고를 준비하던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 정도였다.
“오빠들은 배 안에서 하늘과 땅의 조화와 몸과 마음, 삶과 죽음의 원리의 시작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 때의 놀라움과 놀라움 어두운 밤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惝怳驚疑 若河漢之無極(若河漢之無極)
이벽의 말에 정약용이 많이 놀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위의 말에 종교적인 기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후 종형은 이벽과 함께 지내며 천문지리, 기하학, 수학 등 다양한 과목을 알아갔다.(嘗從李檗遊聞曆數之學) 그 후 그는 서울로 돌아가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동양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처럼 이벽도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수학과 과학 같은 서양학이 동양보다 우월하다고 설교했을 것이고, 학문이 우수한 서구 선진국들은 모두 천주교를 믿는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정약용도 정약전도 위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제사를 폐지한다는 말은 없었다.而此時無廢祭之說(而此時無廢祭之說)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약전은 신앙보다는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에 접근한 사례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무게를 사용하다그는 삶을 따라가는 남인 실학 선비들과 교류했다. 그는 유클리드를 썼다
아시다시피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는 죄를 지었지만 배교가 인정되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신지도로 유배됩니다. 정약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기에 전라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한편 정약용은 석방됐지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 정약전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애도를 표했다.
“오! 그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같은 집안 출신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종형이 죽은 뒤 나약용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고, 7년 동안 고단한 삶을 살았다.
다시 말해서 1816년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인 1822년 환갑을 맞은 정약용은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둘째 형 정약전 때문인가, 아니면 셋째 형 정약종 못지않게 충직했던가. 우선 정약전과 가깝다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정조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예상외로 내부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거스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조를 학문을 장려한 문화군주이자 조선 문예 부흥을 이끈 선인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오해다. 그가 학문을 장려한 것은 성리학의 틀 안에서의 학문일 뿐 서양 학문을 엄격히 거부했다. 1786년 즉위 10년, 정조는 사헌부장 김이소 대사헌이 옳다고 믿은 한문금지령을 지켰다.
김이수: “최근에 연경(북경)에서 사는 책은 대부분 유교 경전이 아니라 불순한 책이 대부분입니다. 이단이 만연하고 사교가 인기가 있습니다. 그게 나쁘다. 작년에 이미 공개된 내용입니다.. 어쨌든 의주에서 사지 말아야 할 책을 산 사람들을 조사하고 엄격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십시오.”
정조: “위의 내용이 아주 좋습니다. 그에 따라 연습하십시오.”
심풍지 사간원 원장도 중국 서적 유입 차단을 촉구했고, 정조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금지뿐 아니라 새로운 형벌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조의 유입을 막는 책은 천주교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선진문명을 담고 있는 책은 모두 배척당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입 금지 1792년 비변사에 의해 제정된 이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은 모두 검문과 수색을 당했고, 유교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책은 압수당해 불태워졌다. 또 그런 책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상급자를 불러서 범행을 물었고, 잡지 못한 의주 부윤(의주시장)은 처벌을 받았다.
그 결과 서방에서 유입된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배워 부강해지려는 소위 북방 학파의 이상은 좌절되었다.
* 1791년(정조 15) 바오로 윤지충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 윤지충 정약용의 외삼촌 역 24세에 진시에 합격한 그는 이후 정약전·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에 입문했다. 그는 정약용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정약용의 권유로 중국에서 거듭 세례(확인)를 받았다. 1 후791년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는 기존의 방식대로 하되 제사는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 전 정조와 같은 신앙인이다. 외사촌인 제임스 권상연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참수당했다.
이때 대사들 사이에 신기가 다음과 같이 말했고, 정조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참신함: “권(權) 윤(尹) 양지(兩賊)는 유학자 이름을 가진 가문으로 역사도 있다. 설령 원하는 학식만 고집하고 유교를 배반한다 해도 참으로 비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성신을 불태우고 부모의 시신을 버렸습니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놈… 윤권 양양을 면밀히 조사하여 진상을 규명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고 특히 두려움 없이 몰래 이 과학을 숭배하는 자를 엄중히 선발하여 책을 불태우고 이들을 처벌하여 그 뿌리를 뽑아내라. 버리고 출처를 차단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조: “나열된 여러 조항에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또한 대간의 답에서 주어진 이단의 폐해에 대해서는 최근에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짐승과 오랑캐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그녀를 처벌할 것이다. 그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몰래 숭배하는 사람들도 요구에 따라 엄격히 금지되며 발각되면 처벌됩니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좌파 의원인 채제공의 의견을 무시하고 형조에게 처형당했다.
형조는 “윤권 양적 죄의 왼쪽 정의 카예그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 군중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참수되었고 5 일 동안 자살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강한 도덕이 매우 중요하며 사악한 학습은 그들이 경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했습니다.”
정조: “사당을 불태우든 묻든 사당 중앙에 있는 사당을 고의로 만진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종류의 일을 할 수 없습니까? 심지어 사형도 다소 느슨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정약용은 채제공과 함께 수원 화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두 사람은 2년 반에 걸쳐 정조의 야심작을 완성했는데, 정약용이 당시 천주교를 믿었더라면 당시의 희락을 함께 했을 것이다. 채제공에게 자신의 믿음을 숨길 수 있었을까. 참고로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질문에 답변을 드렸습니다. 채제공의 말은 이랬다.
“그 연구는 오로지 천국과 지옥의 이론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원래 의미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악은 아비도 없고 왕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섬김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서명하늘을 아버지라 부른다(乾稱父)는 뜻에 속하나 조화옹을 제2의 아버지로, 낳아 준 아버지로 묘사하는 점에서 윤리가 없고 의리에 위배되는 이론이다. 세 번째 아버지. 우리나라는 예의 바른 나라인데 소문에 속았다는 것이 참으로 비열하다”고 말했다.
화성건축의 정약용거중기와 녹로 같은 중장비는 『장비서』 등의 책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장비와 함께 화성 건축의 공기 2년 9개월로 대폭 단축 비용도 절감되었습니다. 정조는 완벽한 꽃이다나는 성을 둘러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이 크레인으로 40,000냥을 절약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기도설』도 중국에서 들여와 규장각의 정조에게 하사한 과학서이다. 그리고 그 책의 출처는 서양 기술이었습니다. (독일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의 책입니다.) 정약용은 서구 기술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을 때 서구 국가의 근본으로 여겨졌던 천주교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해석하는 한, 천주교는 서방 국가에 있다 조선의 유교와도 같았다. 그러나이 유교는 동시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끝없는 법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만큼그러나 정조 사후 신유박해 때 가책 없이 배교하였다. 아마도 그 비밀은 복원된 건물의 상량문에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